721년, 열여덟 살의 젊은 승려 혜초(慧超)는 고향인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여정은 훗날 불교사에서 가장 놀라운 여행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
혜초는 중국에서 상인의 배를 타고 오늘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해당하는 스리비자야(Shrivijaya) 왕국으로 항해했다. 그리고 724년 마침내 인도에 도착했다. 혜초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부처님의 생애와 전생과 관련된 성지들을 순례했으며, 남아시아의 여러 불교 성지를 찾아갔다. 그는 오늘날의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을 두루 여행했다. 그러나 다른 순례자들의 여정이 끝나는 곳에서도 혜초의 여행은 계속되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더 서쪽으로 나아가 페르시아(Persia)까지 여행했다. 그곳에서 혜초는 이슬람교를 접하게 되었으며, 당시 이슬람에 관해 기록을 남긴 불교 승려의 기록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른 기록 중 하나를 남겼다.
이후 혜초는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실크로드(Silk Road), 즉 비단길의 교역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지나갔으며, 727년 무렵에는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1908년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유명한 막고굴 장경동(藏經洞, Library Cave)에서 혜초가 남긴 여행기 필사본의 일부를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가 젊은 한국 승려 혜초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은 바로 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혜초의 여행기에서 비롯된다.
혜초는 인도까지 먼 길을 떠난 동아시아의 구법승 가운데 결코 최초의 인물도, 마지막 인물도 아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었고, 역사 속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또한 혜초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 뛰어난 역경승으로 활약하거나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으로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방대한 중국불교 문헌 속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만약 폴 펠리오가 그의 여행기를 찾아내지 않았다면, 혜초는 어쩌면 시간의 거센 흐름 속에서 영원히 잊힌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그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불교도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행했던 구법과 순례 가운데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하고도 참으로 놀라운 여정을 만나게 된다.
혜초는 대체로 앞선 구법승들이 개척해 놓은 순례길을 따라갔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여정을 이어갔다. 그는 인도의 전통적인 불교 성지를 상당수 방문했지만, 날란다(Nalanda)의 승가대학과 같은 중요한 불교 교육기관은 건너뛰었다. 반면 나시크(Nasik) 인근의 불교 석굴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후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순례길에서 훨씬 벗어난 페르시아까지 여행하였다. 알려진 불교 구법승 가운데 그보다 더 먼 곳까지 여행한 사람은 없었다.
혜초는 불교의 중심지인 인도 불교의 심장부를 직접 찾아가겠다는 자신의 목적은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승려들이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가장 일반적인 목적, 곧 불교의 발상지에서 산스크리트 불교 경전을 배우고 수집하는 일은 실현하지 못했다.
혜초의 여행은 또한 매우 짧은 기간에 다양한 자연환경과 문화권을 빠르게 통과한 놀라운 여정이었다. 그가 여행기에서 남긴 관찰은 불교 수행자의 시선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족지학자(ethnographer)의 시선에 가까웠다. 현지 언어를 알지 못했던 혜초에게 현지인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주로 예술과 건축, 자연경관과 기후, 사람들과 가축 등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가 얻은 여러 정보는 상인들의 대상(隊商)이나 순례자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전해 들은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혜초를 특별한 인물로 만드는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는가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니었으며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이루어낸 여러 놀라운 성취는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혜초와 그의 여행기, 그리고 그의 구법 여정은 8세기 불교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독특한 경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의 기록은 단순한 불교 순례기가 아니라, 당시 인도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를 아우르던 광대한 세계의 문화와 사람, 자연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혜초 법사의 인도 남방 구법길에서 지은 오언시이다.
[남방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
달 밝은 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바라보니,
오직 떠도는 구름만이 고향으로 흘러간다.
구름을 따라 편지 한 통 부치고 싶건만,
바람은 사납게 불어 내 뜻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내 나라는 하늘 저 북쪽 끝에 있고,
남의 나라는 아득한 서쪽 끝에 놓여 있다.
따뜻한 남쪽 땅에는 기러기조차 찾아오지 않으니,
누가 숲을 지나 내 소식을 전해 줄 것인가.
혜초가 아름다운 카슈미르 계곡에 들어섰을 무렵, 카슈미르는 이미 아시아의 위대한 문화 중심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학·철학·예술·종교사상 분야에서 독창적인 발전과 뛰어난 성취를 이룩한 카슈미르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자, 이러한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발전이 비롯된 발원지였다. 카슈미르의 사상가와 스승, 예술가들이 미친 영향은 인도 전역에만 머물지 않고 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날 카슈미르는 힌두 철학과 산스크리트 문학, 이슬람 신비주의와 이슬람 건축에 기여한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불교가 이 계곡의 지배적인 종교적·문화적 세력이었다.
혜초가 카슈미르에 도착하기 한 세기 전, 중국의 구법승 현장(玄奘)은 이곳에 100개의 사원과 5,000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아소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네 개의 불탑도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현장은 카슈미르에서 경험한 지적 자극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의 한 사원에 머물면서 2년 동안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혜초의 인상은 이와 같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불평하였다.
"이곳은 매우 춥다. 지금까지 내가 말해 온 곳들과는 전혀 다르다. 가을에는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온다. 여름에는 장맛비가 내려 온갖 식물이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무성하게 하지만, 가을이 되면 모두 시들어 흩어진다."
혜초가 다녀간 뒤 수십 년, 그리고 수 세기가 지나면서 힌두교에 이어 이슬람교가 불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때 불교 사원이었던 곳이 힌두교의 샹카라차리아 사원(Shankaracharya Temple)으로 바뀐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이 사원은 훗날 '타크티 이 술라이만(Takhti-i-Sulaiman)', 곧 '솔로몬의 왕좌'라고 불리게 된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카슈미르는 불교의 학문과 사상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원천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특히 탄트라 불교, 즉 금강승(Vajrayana)의 전통과 그 예술적 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카슈미르의 불교 스승들과 예술가들은 서부 티베트의 새로운 왕국들에서 일어난 불교 부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참여자가 되었다.
나는 카슈미르에서 산맥을 넘어 서북쪽으로 약 한 달 동안 여행하여 간다라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의 왕과 군대는 모두 돌궐족이며, 현지 백성 가운데에는 호인(胡人)이 많고 또한 일부 바라문도 있다.
이 나라의 북쪽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산속에 거주한다. 그러나 산에는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아 매우 황량하다. 그곳의 의복과 풍속, 언어와 기후는 다른 지역과 모두 다르다. 사람들은 양털과 고운 모직으로 만든 옷을 함께 입으며, 장화와 바지를 착용한다. 이곳의 땅은 보리와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만, 조·수수·벼는 전혀 나지 않는다. 평민들은 주로 보릿가루와 빵을 먹는다.
비록 왕은 돌궐인이지만 삼보(三寶)를 매우 깊이 공경한다. 왕과 왕비, 왕자와 장군들은 각각 사원을 세우고 삼보에 공양한다. 왕은 해마다 두 차례 대법회(大法會)를 열어 자신이 직접 사용하거나 아끼던 물건들을 모두 보시한다. 심지어 자신의 왕비와 코끼리, 말까지도 보시한다.
그러나 왕비와 코끼리에 대해서는 승려들에게 값을 정하게 하여, 다시 그 값을 치르고 되사오도록 한다. 그 밖에 보시한 낙타와 말, 금과 은, 의복과 가구 등은 승려들이 팔아서 그 수익을 나누어 갖는다.
이 왕은 북쪽에 있는 돌궐 왕과는 매우 다르다. 그의 자녀들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원을 세우고, 연회와 법회를 열며, 재물을 보시한다.
— 혜초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기록
혜초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안에 해당하는 다섯 곳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은 토착 왕조와 여러 외부 세력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문화적으로는 인접한 간다라의 영향권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이곳의 불교 공동체와 불교 미술의 전통은 간다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경제적 중심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간다라의 부가 점차 쇠퇴하는 한편,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불교에 대한 후원이 크게 활발해졌으며, 불교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었다. 4세기부터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새로운 사원과 승원이 건립되었고, 기존의 사원들은 보수·개축되었으며, 이들을 장식하기 위한 수많은 불교 예술품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미얀(Bamiyan)의 거대한 불상이다. 이 불상들은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어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하다.
8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한 혜초는 바로 이러한 불교 황금시대가 남긴 결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는 곳곳에 많은 승려와 사원이 있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불교 신앙과 수행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글·사진=보검스님 ㅣ 세계불교 네트워크 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