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법과 전법을 실천한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삶 – 의정 삼장 법사 편<3>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 삼장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구법승이자 역경승이다. 법현(法顯)법사나 현장(玄奘) 삼장의 여행 기록에 비하면, 의정(義淨) 법사의 저술은 아시아사와 세계사를 연구하는 승려나 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의정은 671년 인도로 출발하여 695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의정 삼장은 중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실리불제(室利佛逝, Śrīvijaya) 왕국, 즉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두 편의 매우 중요한 저술을 완성하여 중국으로 보냈다. 그것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즉 남해에서 인도의 불교 수행법을 중국에 보내 기록한 책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즉 대당 시대에 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와 그 주변 지역을 방문한 고승들의 전기이다.
앞의 저술인 《남해기귀내법전》은 당시 인도에서 불교의 교리와 승가의 계율이 실제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한 자료이다. 뒤의 저술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7세기에 인도로 여행한 56명의 중국(한국) 승려들에 관한 전기적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의정(義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수록된 중국 구법승들의 전기는, 인도로 가는 여행이 매우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동안 중국의 불교 승려들이 상당히 자주, 그리고 적지 않은 수로 인도를 방문했음을 보여준다.
이들 승려 가운데 일부는 중앙아시아와 티베트를 거쳐 인도로 가는 육상로를 이용했다. 또 다른 승려들은 의정과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의 항구들을 경유하는 해상로를 이용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승려들은 구법 여행을 마친 뒤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떤 이들은 인도에 계속 머물기로 결정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귀환길에 오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전기들은 인도로 여행했지만 자신의 여행 기록을 남기지 않은 중국 승려들의 구법 행적을 간략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예를 들어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제1권에 수록된 현조(玄照) 스님의 전기에서 의정은 먼저 현조의 가계와 출신 배경을 소개하고, 그가 불교 교리를 배우고 익힌 과정과 티베트를 거쳐 인도로 향했던 긴 여행, 그리고 인도 승원에서 받은 교육에 대해 서술한다. 이어서 현조가 네팔과 티베트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 과정도 기록한다.
그런데 현조가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 고종(高宗)은 그에게 다시 인도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다. 황제를 위해 장수를 가져다줄 약물과 의사들을 구해 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의정의 기록에 따르면 현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중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현조의 전기는 다른 55명의 구법승 전기와 함께, 7세기 중국 불교 승려들이 인도의 불교 성지를 직접 방문하고 그곳에서 불교를 배우고자 했던 확고하고 열렬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이 자료는 단순히 몇몇 승려들의 여행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의정의 전기집을 통해 우리는 7세기 중국 불교계와 인도 불교계 사이에 실제로 상당히 활발한 인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인도 구법로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육상로는 중국 → 중앙아시아 또는 티베트 → 인도의 방향이고, 해상로는 중국 → 동남아시아 항구 → 인도이다.
따라서 7세기의 중국 승려들은 단순히 중국 안에서 경전을 연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법을 직접 찾아가 배운다”는 구법 정신에 따라 위험한 장거리 여행을 감행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은 바로 이러한 7세기 동아시아 불교와 인도 불교 사이의 실제적인 교류망을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인도로 가는 위험하고 험난한 여행을 직접 감행할 수 없는 수많은 불교도(특히 승려)들을 염두에 두고, 의정(義淨)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이 기록을 읽는다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서도 인도의 다섯 지역을 두루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의정 법사는 이 저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바람을 밝힌다.
“나의 진실한 희망과 소원은 벗들이 있는 소실(小室), 곧 숭산(嵩山)의 봉우리에 영취산(靈鷲山)을 재현하고, 중국이라는 신성한 땅에 또 하나의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을 세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발언은 의정뿐만 아니라 법현(法顯)과 현장(玄奘)을 비롯하여 인도에서 구법 여행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여행기를 남긴 모든 중국 구법승들의 공통된 염원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여행기를 통해 중국에서 불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성스러운 장소와 사건들을 마음속으로 직접 그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중국의 불교도들이 직접 인도를 방문하지 못하더라도, 구법승들의 기록을 읽음으로써 부처님의 발자취와 성지를 상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구법승들은 인도에서 돌아올 때 불교 경전, 불사리(佛舍利), 그리고 각종 불교 관련 물품과 성물을 함께 가져왔다. 이를 통해 중국 안에 인도와 같은 불교적 세계를 재현하려고 했다.
즉, 중국의 불교도들이 인도로 가는 고되고 위험한 여행을 직접 하지 않더라도, 중국에서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 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노력은 중국 불교도들이 느끼고 있던 ‘변방 의식’, 즉 인도가 불교의 중심이고 중국은 그 주변부에 불과하다는 심리적 열등감이나 주변부 의식을 해소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구법승의 여행은 단순한 개인적인 순례가 아니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성지를 옮겨오는 작업, 다시 말해 인도의 불교적 성스러운 공간 → 중국에서 재현이라는 문화적·종교적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따라서 의정이 말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인도의 다섯 지역을 여행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구법승들의 기록과 경전·사리·성물을 통해 중국의 불교도들에게 ‘인도 불교의 세계’를 중국 안에서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특히 영취산과 왕사성의 중국 내 재현은 이후 중국 불교에서 성지와 사찰 공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도의 성스러운 공간이 중국 불교문화 속에서 새로운 성지로 번역되고 재창조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불교에도 적용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글·사진=보검스님 ㅣ 세계불교 네트워크 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