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법과 전법을 실천한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삶 – 현장 삼장 법사 편<2>
현장(玄奘, Xuanzang) 삼장은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인도 애호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불교 교리와 인도를 성지(聖地)로 인식하는 관념을 널리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였던 당 태종(재위 626~649)과 당 고종(재위 649~683)에게 적극적으로 건의함으로써 인도와 중국 사이의 외교 관계를 증진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의 인도 구법 순례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The Records of the Western Regions Visited During the Great Tang Dynasty)》는 동시대 중국 불교계뿐만 아니라 그의 왕실 후원자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저술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종교적 순례의 기록인 동시에 당나라와 인접한 여러 국가와 사회를 기록한 역사 자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대당서역기》에서 현장은 독실한 불교 순례자이자 당나라의 외교적 사절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함께 보여 준다.
현장이 627년 인도 순례를 시작했을 무렵, 중국에서는 이미 불교 교단과 교리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불교의 기본 경전은 거의 모두 중국어로 번역되어 있었으며, 도교와 유교의 기존 사상 체계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중국 고유의 불교 저술도 대량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또한 천태종(天台宗)과 같은 중국 고유의 불교 종파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불교의 영향력은 중국인의 장례 의식과 사후 세계관, 예술 전통에까지 폭넓게 미쳤으며, 나아가 정치 영역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더불어 중국은 남아시아 밖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 연구와 교육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고, 이곳에서 발전한 불교 교리는 다시 한반도, 일본 및 주변 여러 왕국으로 전파되었다.
# 현장(玄奘)삼장의 순례와 번역 활동
서기 약 600년경에 태어난 현장은 스무 살 무렵 출가하였다. 다른 중국 순례승들과 마찬가지로, 현장이 험난한 인도 여행을 감행한 주요 목적 중 하나는 불교 성지를 직접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던 인도 불교 경전의 번역본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전(原典)을 직접 구하고 인도 스승들에게서 불교 교리를 배우고자 하였다.
현장은 당시 중국에 전해진 불교 경전 번역의 문제점에 대한 불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비록 부처님은 서쪽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법(法)은 동쪽으로 전해졌다. 번역 과정에서 경전에 오류가 생길 수 있고, 표현이 잘못 적용될 수도 있다. 말이 잘못되면 의미가 사라지고, 구절이 틀리면 가르침의 본뜻이 왜곡된다.”
현장의 사명은 그가 인도에서 가져온 657종의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수행한 번역의 높은 수준을 통해서도 성공적이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 그는 고대 중국에서 활동한 가장 뛰어난 불교 경전 번역가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현장은 당나라 조정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그의 불법적인 출국은 현장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여러 중요한 외국 통치자들을 의도적으로 알현하려 했던 이유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이러한 통치자들의 지원이 타국에서의 여행과 궁극적으로 중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관료들의 간섭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현장은 자신의 저술을 읽게 될 가장 중요한 독자인 당 태종에게 자신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강력한 군주들과 맺은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류를 알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기록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통치자들이 수행했던 정치적·외교적·종교적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법현과 마찬가지로 현장 역시 중앙아시아 여러 왕국에 미친 인도 문화의 영향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기(焉耆, Agni), 구자(龜玆, Kucha), 우전(于闐, Khotan)의 사람들이 인도계 문자를 변형한 문자 체계를 사용했다고 보고한다. 또한 법현과 유사하게, 현장은 자신이 방문한 불교 성지와 직접 목격한 불교 유물에 관련된 불교 설화와 기적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기록은 법현보다 훨씬 상세하다.
법현이 경험했던 인도와 중국 사이의 장거리 여행의 위험성 역시 현장의 저술 속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현장 기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2권에 수록된 인도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과, 제5권에 나타나는 중국 승려 현장과 인도 국왕 하르샤바르다나(Harṣavardhana) 사이의 교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다.
현장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2권을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타난 인도의 명칭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인도를 가리키는 올바른 중국어 명칭은 ‘인도(印度, Yindu)’라고 밝히며, 이 명칭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어서 현장은 인도의 지리와 기후, 도량형 체계, 그리고 시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한다. 또한 도시 생활과 건축 양식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소개하며, 당시 인도 사회에 존재했던 카스트 제도, 브라만 계층의 교육 과정, 불교 교리의 전승과 교육 방식, 법률 및 경제 제도, 사회·문화적 관습, 그리고 현지인들의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자연 산물과 인공적으로 제작된 다양한 물품들을 목록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이러한 기록은 7세기 인도의 사회 구조와 문화, 종교, 경제 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현장은 인도 전체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마친 뒤, 자신이 인도에서 방문했던 여러 왕국과 도시들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이어간다. 그중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제5권에서는 하르샤바르다나(Harṣavardhana) 왕국의 수도였던 카나우지(Kanauj, 迦那臂)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현장은 다른 부분의 서술 방식과 마찬가지로 제5권에서도 먼저 카나우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그 도시의 건립에 얽힌 전설을 소개한다. 그는 당시의 통치자가 하르샤바르다나였음을 밝히고, 그의 덕행과 용맹함, 그리고 불교 교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강조한다.
이어서 현장은 자신이 인도 왕을 직접 알현한 일을 기록한다. 현장에 따르면 하르샤바르다나는 중국에 ‘자비로운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현장은 그가 들었던 통치자가 바로 현재 당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태종(太宗) 황제라고 설명하였다.
이 기록은 단순한 두 왕국 간의 만남을 넘어, 7세기 중국과 인도 사이의 정치적 인식, 외교 관계, 불교적 이상 군주관이 어떻게 서로 교류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실제로 현장은 당나라로 귀국한 이후에도 두 왕조 사이의 불교 교류와 외교적 관계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다.
현장이 이러한 관계 증진에 힘쓴 동기는 인도 내 주요 불교 성지들과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던 나란다(Nālandā) 대학이 모두 하르샤바르다나 제국의 영역 안에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장은 두 왕조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가 당나라와 북인도 사이의 불교 교류를 더욱 원활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글·사진=보검스님 ㅣ 세계불교 네트워크 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