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전(蘆田) 묵창선 화백


북종화(北宗畵)의 대가로서 전남 강진군 명인으로 지정된 노전(蘆田) 묵창선 화백. 인간문화재 묵계월 선생의 조카로도 유명한 묵 화백은 1942년 황해도에서 출생해 20여 년 전 강진군 작천면에 자리를 잡고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먼저, 화백님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북종화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며 감사하게도 정부로부터 명인 인증을 받았다. 유니세프 후원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북종화란 말이 다소 생소합니다. 북종화란 무엇입니까?

외면적 묘사에 치중해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산수화의 화풍이다. 사진 같은 그림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을 남종화라 하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산수화의 화풍이다.

북종화를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북종화는 우리나라의 북쪽, 즉 북한지역에서 유행했는데,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북종화에 익숙해졌다.

혈혈단신 남쪽으로 내려와 터를 잡은 후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북종화에 좀 더 애착한 것 같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북종화를 그리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북종화는 전체적으로 북한 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금강산, 묘향산, 금송, 백송, 호랑이 등 모든 작품의 배경과 대상이 북한이다.

남쪽의 그림, 즉 남종화는 그리지 않으십니까?

아예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잘 그리진 않는다. 북종화 화가인 만큼 북종화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간혹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게 판매에도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판매가 목적이 아니기에 단호히 거절한다.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니 확실히 디테일이 남달라 보입니다?

북종화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금송이나 백송 그림을 보면 곧게 뻗어 있지 않고 약간씩 뒤틀려 있다.

호랑이 그림도 수컷과 암컷의 차이가 있는데, 수컷보다 암컷이 더 용맹스럽다. 이런 디테일함이 북종화의 매력이다.

작품의 세밀한 디테일을 표현하려면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기본적으로 원근법과 구도법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관찰력도 필요하다. 대상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으면 디테일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동양화이기에 먹 하나만 가지고 사계절을 다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농묵, 흑묵, 중묵, 담묵, 비묵 등 5가지 색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아야 한다.

노전(蘆田) 묵창선 화백의 작품


먹을 제외하면 접근 방법이 서양화와 비슷한 것 같은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사실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북종화와 서양화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물감과 종이의 차이다.

서양화는 유화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덧칠 등의 수리과정을 거쳐야 하는 반면, 북종화는 수천 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다.

명인으로 불리시는 만큼 그 이력도 화려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주요 이력을 말하자면, 대한민국 종합미술대전에서 특선과 한국문화대상의 대상을 받는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또한 지금까지 개인전만 40여 회를 가졌고, 각종 초대전에 참가한 것도 부지기수다.

미국과 호주, 중국, 일본, 필리핀, 대만, 캐나다, 독일 등 해외 전시회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자가 몇 명 정도 있습니까?

전남과 강진지역의 문하생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짬을 내 북종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지도하고 있다. 그렇게 배출한 제자가 160여 명 정도 될 것 같다.

북종화 화가로서 가장 보람 될 때는 언제입니까?

내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다. 그때의 보람은 그 어떤 것보다 더할 나위 없이 크고 값지다.

일례로, 얼마 전에 울산에서 지인들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식당 주인이 날 알아보고 그림 한 점을 그려주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기에 반은 재미 삼아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줬다.

그런데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조아리며 무슨 큰 보물이라도 얻은냥 너무나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가슴이 울컥하면서 그림을 그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운보 김기창 화백과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때 선생께선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과정은 그림 판매를 통해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니고, 좋은 그림을 후세를 위해 남기기 위함이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이 여든이 되고 보니 그 말씀이 절실히 공감된다.

그런 관점에서 욕심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좋은 그림 한 점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