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작가, 신이 내린 작가, 인도가 사랑하는 작가…. 놀랍게도 이 모든 수식어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 대한민국 미술학 박사 1호인 한서대학교 서분순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에 충남 예산의 서 교수 자택에서 만남을 갖고 지금까지 걸어온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죽음을 예술로 담는다고?
죽음을 예술로 담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다. 죽음이란 끝을 의미할진 데 이를 예술로 표현한다는 게 좀처럼 와 닿지 않는 탓이다. 그런데 서분순 교수는 이러한 난제를 별거 아닌냥 거침없이 화폭에 풀어낸다.
“죽음이 뭐 대단한 건가요. 자연의 섭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데.”
왠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왜 우리는 그동안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죽음을 입에 담길 꺼려하면서 거창한 미사여구로 포장하려고만 했을까. 아마도 두려움이 앞섰던 탓일게다. 죽음에는 심판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으니.
“처음부터 죽음을 지금처럼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수많은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듯 죽음을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짐작컨대 아마 상상도 못할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왔음이 분명할 터다.
지옥을 향해 떠나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녀다. 새로 도배한 벽지에 그림을 잔뜩 그려놓는 것은 예삿일일 정도로 집안 구석구석 그녀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그만큼 그림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인데, 당연한 수순으로 미대에 진학해 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후에도 대학 출강을 나갈 정도로 인정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작가로서 인정받고,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금쪽같은 아이도 생기고, 가정은 화목하고…. 나름 괜찮은 삶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어요. 그러면서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갈증이 점점 커지더군요. 이러다간 죽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살아서 가 볼 수 있는 지옥을 가 보기로 결심했죠.”
그녀의 첫 번째 선택지는 미국 뉴욕의 할렘가. 위험지역의 대명사로 불렸던 터라 지옥의 모습에 가장 근접한 곳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모습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지옥행은 최악의 상황으로 나 자신을 내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어요. 그런데 할렘가는 그리 최악이 아니더라고요. 나름의 규칙 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여느 곳과 다를 바 없었어요. 그래서 1년 만에 돌아왔죠.”
아! 이곳이 지옥이구나
할렘가를 다녀온 이후에도 지옥행에 대한 욕구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디 또 지옥일 없을까’란 상념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이에 인도에서도 최악의 도시로 정평이 나 있던 바라나시로 두 번째 지옥행을 떠나게 된다.
“바라나시에 대해 미리 공부하면 못 갈 것 같아서 기후와 환경 등의 조건만 숙지하고 짐을 쌌어요. 그리곤 남편에게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좋은 여자 있으면 장가를 가시오’라는 편지를 써놓고, 또 친정어머니에게는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남기고, 무작정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죠.”
인도에서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콜카타(옛 명칭 캘커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후끈한 더위와 수많은 거지떼였다. 더군다나 거지떼는 그녀를 둘러싼 채 다른 이에게 뺏길 새라 너도나도 손을 내밀어 ‘give me’를 연신 외치대며 그녀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 모습에 그녀의 입에선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이곳이 지옥이구나.”
죽음을 경험하다
콜카타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바라나시에 도착한 그녀. 하지만 사전 준비 없이 간 터라 모든 게 막막했다. 잠자리야 어찌저찌 허름한 여관방을 잡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당장 먹거리가 문제였다. 향신료 탓에 입에 맞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기에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토병까지 찾아왔다. 어찌 보면 예상된 결과였다. 현지인이 아니고선 건강한 사람도 병이 난다는 환경인데, 제대로된 식사조차 하지 못하는 연약한 40대 여성이 버텨내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테니.
“작은 여관방 한켠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사경을 헤맸어요. 중간중간 약간이나마 의식이 들 때면 ‘아! 이렇게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예수님, 하나님, 부처님 등을 다 찾으며 살려달라고, 제발 살아서 자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어요. 그리고 며칠을 앓고 난 후에야 기적적으로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죠. 나중에 들었는데, 여관 주인은 내가 죽은 줄 알고 장의사를 부르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시체 썩는 냄새에 취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녀는 ‘환골탈태(換骨奪胎)’란 말처럼 이전과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졌고, 사고의 폭은 한계가 사라졌다.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이전에는 생존이 전부였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이때부터 서서히 붓을 들기 시작했어요. 삶에 대한 강박을 깨고 나니 비로소 많은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들판을 거닐던 중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냄새에 이끌려 부지불식간에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 그렇게 홀린 듯 찾아간 곳에는 죽은 소가 덩그러니 버려진 채 지독한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까마귀 떼에 뜯겨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죽어 있는 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자화상처럼 느껴지더군요. 처절하게 살아왔음에도 결국 죽음으로 내몰릴 것을, 나 역시 지금 죽어가고 있음을 새삼 깨우치게 됐죠. 하지만 아쉽거나 슬프거나 하진 않았어요. 그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 즉 새로운 삶(윤회)으로 느껴졌으니까요.”
그날 그녀는 오랜만에 캔버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온몸을 관통했던 그날의 감정과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해 미친 듯이 붓을 놀렸다. 몇 날 며칠을 이어진 작업. 끼니도 잊었다. 잠도 잊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었다. 오로지 붓 끝에만 집중하며 말 그대로 혼을 불어넣었다. 그녀 필생의 역작, ‘또 하나의 나’는 그렇게 탄생했다.
죽음과 삶, 그리고 진한 감동
‘또 하나의 나’ 작품은 그녀의 시그니처인 버팔로(소)와 까마귀가 등장하는 첫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견 단순해 보인다. 버팔로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런 버팔로의 시체에 까마귀떼만 무성할 뿐이니. 채색도 검은색과 붉은색, 흰색이 전부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전체적으로 화폭을 지배하고, 간혹 흐릿한 흰색이 엿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 하나하나에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의미 역시 가볍지 않다. 더군다나 각각의 의미는 서로 연결되어 더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
“버팔로는 치열한 삶을 살다가 결국 스러지고 마는 우리네 인생의 자화상이에요. 까마귀는 버팔로의 영혼을 연결하는 생과 사의 전령사이고요. 검은색과 붉은색의 조합은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흰색은 부활을 상징해요. 그리고 그림 한켠에 항상 태양과 같은 매개체를 그려 넣는데, 이것은 넥스트라이프, 즉 다시 죽어서 태어나는 내세의 표현이며 희망의 표현이죠.”
그래서일까. 이 작품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 두려운 감정도 생겨난다. 심지어 머리가 쭈뼛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음도 묘하게 요동친다. 그리곤 툭하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다
그녀에게 인도는 지옥인 동시에 천국이기도 했다. 처음에야 지옥처럼 느껴졌지만 10년이란 시간을 부대끼면서 생과 사의 본질을 마주하고 어떤 한계나 속박 없이 마음껏 예술혼을 불사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라나시에 위치한 세계적인 힌두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의미심장한 건 대학 측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격을 높일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출중한 이미 완성된 작가라고 판단한 것인데, 실제로 그녀의 작품들을 본 총장과 교수들은 전례 없는 만장일치 합격을 결정했다. 이는 지금도 힌두대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힌두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한층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며 나름 명성을 쌓아가던 그때,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찾아온다. 인도 바라나시 국립박물관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카스트 제도가 존재할 만큼 극도로 보수적인 인도에서 자국 작가를 대신해 외국 작가를, 그것도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여성 작가를 참석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꿰찼으니, 인도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초대전의 결과는 어땠을까? 그녀의 개인전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관심이 온통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녀의 작품 앞에 걸음을 멈춘 채 눈물을 터트리는 관객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매일 같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언론도 앞다퉈 연일 극찬을 쏟아냈다. 한 현지 언론은 “작가는 하늘에서 내린다. 그런 하늘이 내린 선물 중 가장 귀중한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온 서분순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때부터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작가’, ‘신이 내린 작가’라는 수식어는 그녀의 대명사가 됐다.
작품은 분신이자 자식 같은 존재
인도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그야말로 ‘서분순 신드롬’이 불어닥쳤다. 세계 각지에서 전시회 제의가 잇따랐고, 그녀의 그림을 얻기 위한 러브콜도 줄을 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반응은 뜨뜻미지근. “이름을 날리거나 돈을 벌기 위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는데, 왜 내 귀한 시간을 거기에 써야 하지”라는 게 그녀의 속내였다.
그렇다고 작가주의에 빠져 마냥 독불장군처럼 굴었던 것은 아니다. ‘그림은 대중 속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는 지론도 갖고 있었기에 여러 국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작품도 판매했다. 다만, 그 선택 과정이 무척이나 까다로웠다. 일례로, 작품을 판매할 경우 사전에 구매자의 신상명세를 물론, 직접 대면해 그림이 걸릴 위치까지 세세하게 체크했다.
만약 하나라도 기준에 어긋나면 절대 판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림을 판매했더라도 그림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떼 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흔히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는데, 그게 괜한 말이 아니에요. 진짜 자식 같거든요. 그런 귀한 자식을 어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겠어요.”
그림을 그리다 조용히 떠나고파
현재 그녀는 충남 예산에 머물며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인근 한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때론 소소하게 강좌를 열고,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을 지도하기도 한다.
치열했던 인도 시절에 비하면 많이 유해진 모습이다. 그만큼의 세월이 더해졌으니 당연한 일일테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간 그녀를 보게 된다면 이런 말들은 쏙 들어간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해 붓 대신 칼을 들고 화폭을 휘젓는 모습이 여전히 예사롭지 않기 때문인데,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혼을 담아 칼춤을 추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죽기 전에 사상과 철학, 영혼 등 내 모든 것을 녹여넣은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싶어요. 마지막 작품은 추상이든, 반구상이든 한계를 두진 않겠지만 분명 기존과는 확 바뀌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