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담 스님

세상에는 인간의 삶을 넘어선 사랑을 실천하며, 말 없는 존재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 이들이 있습니다.

‘동물들의 어머니’, 혹은 ‘개의 어머니’라 불리는 공경희 님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온 분입니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이 땅은 인간만의 땅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축생과 자연이 우리들의 스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 말은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현대 문명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마치 관세음보살의 화신처럼, 그녀의 삶은 한없이 고통받는 생명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미는 자비의 발현이었습니다.

공경희 님은 1944년 11월 6일, 전라북도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물넷이던 1968년, 공무원이던 남편과 중매로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서모 시어머니와 배다른 시누이·시동생이 함께 사는 환경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는 마루를 닦아 놓으면 꼭 신발을 신고 올라갈 정도로 존경을 할 수 없었고, 남편은 술에 취해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고단한 결혼 생활 속에서 그녀는 깊은 절망을 느끼며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의 가피하심인지 공경희 님은 죽음의 길에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혹한 운명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매일 같이 술을 끼고 살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기 일쑤였고, 툭 하면 사람을 때려 치료비를 물어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에 풀칠하는 것을 걱정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갔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20일도 채 안 되었을 때, 생계를 위해 등에 아이를 업고 떡과 감, 계란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에 짐을 이고, 동네를 돌며 장사를 했고, 옷 장사까지 이어가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둘 쌓은 노력 끝에 가게를 차릴 수 있었고, 남편도 점차 변화해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진급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물들의 어머니’, 혹은 ‘개의 어머니’라 불리는 공경희 님(왼쪽)과 그의 저서


그러나 삶은 다시 한 번 그녀를 깊은 슬픔으로 이끌었습니다.

“남편은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가면 살무사를 잡아와 술에 담그곤 했습니다. 업이 많은 미물이라며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꿈에서 세 마리 살무사 중 하나가 백룡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또 다른 꿈에서는 남편이 시체처럼 보이기도 했고, 집에서 죽은 하얀 닭을 신문지에 싸서 가져다 버릴 거라며 나가는 남편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서울 지하철 성수(뚝섬) 분소장으로 근무하던 중, 열차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성내와 잠실 사이에서 열차 소리를 듣지 못하고 치이는 사고로, 수혈과 수술 끝에 사경을 헤맸지만 끝내 새벽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영영 이별해야 했습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도,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 다시 일어섰습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어제처럼… 긴 고통, 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나의 분신 같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줘서 감사합니다.”

공경희 님의 삶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았습니다. 그 고통은 그녀를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모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자비로 이끌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녀가 어떻게 동물들과 인연을 맺고, ‘개의 어머니’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곡담 스님 ㅣ 서울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