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출신 태국 몽꿋 왕 라마 4세


인류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참으로 극적인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 불교사에도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일들이 즐비하다.

달라이 라마와 같은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법왕(法王)이 있는가 하면 티베트 한 종파(宗派)의 수장은 법통(法統) 계승을 위하여 결혼을 하지만, 평범한 라마들은 독신 청정 비구여야 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왕위 계승을 위하여 27년간의 비구 생활을 청산하고 왕이 되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출가 승려나 재가 신도들은 이런 역사적 사건을 단순하게 흑백논리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종교라고 할지라도 인간이 만들어서 운영해 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편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몽꿋 왕(1804년~1868년)은 짜크리 왕조의 네 번째 국왕으로, 라마 4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1851년부터 1868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

몽꿋의 통치 기간은 중요한 근대화 사업과 외교적 교류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태국의 발전과 국제 관계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몽꿋 왕은 1824년부터 1851년까지 왕자 신분으로 27년간 승려로서 평생을 보냈다.

비구 시절 경전을 읽고 있는 비구 몽꿋 왕자.


시암(태국)은 몽꿋의 통치 기간 동안 서구 팽창주의의 압력을 처음 느꼈다. 몽꿋은 서구의 혁신을 받아들이고 기술과 문화 모두에서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했으며, 시암에서 ‘과학기술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몽꿋은 동생 추타마니 왕자를 두 번째 국왕으로 임명하여 1851년 핑클라오 왕으로 즉위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몽꿋은 핑클라오가 자신과 동등한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말했다.

몽꿋의 통치 기간 동안 분낙 가문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분낙 가문은 시암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분낙 가문은 몬-페르시아계 시암 귀족 가문으로, 아유타야 왕국 후기와 라타나코신 왕조 초기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가문은 짜크리왕조의 총애를 받아 고위 직함을 독점하며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은 절정에 달했다.

비구에서 왕실 예복을 입은 몽꿋 왕(47세)


몽꿋 왕은 주로 1951년 뮤지컬 <왕과 나>와 1956년 영화 각색을 통해 서구에 알려졌는데, 몽꿋은 시암의 첫 번째 차크리 왕조 라마 1세와 분롯 공주의 아들인 라마 2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1824년, 몽꿋은 20세가 되면 일정 기간 동안 승려가 되어야 한다는 시암 전통에 따라 불교 승려(계명: 와지라냐노)가 되었다.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전통에 따라 몽꿋은 차기 왕으로 즉위해야 했지만, 귀족들은 왕비 대신 후궁의 아들인 체차다보딘(낭클라오) 왕자를 선택했다.

왕위는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 몽꿋은 정치적 음모를 피하기 위해 승려 신분을 유지했으며, 비구 와지라냐노는 평생을 종교에 헌신한 몇 안 되는 왕실 구성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승려로서 전국을 여행하며 만난 시암 승려들이 빨리어 경전과 율장의 규칙을 완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836년 와지라냐노 비구는 현재 방콕 중심가에 있는 왓 보워니웻 사원 주지로 부임하였다


1829년, 펫차부리에서 그는 승려의 규율인 계율(戒律)을 엄격하게 따르는 붓다왕소라는 승려를 만났다. 와지라냐노는 율에 대한 붓다왕소의 순종에 감탄했고, 종교(불교)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1835년, 그는 비나야(율장)를 강화하는 개혁운동을 시작하여 담마유티카 니까야(Dhammayuttika Nikaya) 또는 담마유트 종파로 발전했다.

몽꿋 운동의 주요 주제는 ‘진정한 불교는 세속적인 문제를 삼가고 영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몽꿋은 결국 1851년에 권력을 잡았고, 같은 진보적 사명을 가진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 시암은 더욱 빠르게 근대화를 받아들였다.

와지라냐노는 두 가지 주요 혁명적 변화를 주도했다. 서구적으로 여겨지는 다른 과학들 중에서도 현대 지리학을 받아들이고, 불교 개혁을 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시암 상좌부 불교라는 새로운 종파가 탄생했는데, 당시 시암에서 수행되던 불교 질서의 순수성과 타당성에 도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선교사 및 선원들과 함께 라틴어, 영어, 천문학을 공부하며 서양 교육을 받았다.

방콕 로마 가톨릭 대교구의 팔레고아 대리구가 근처에 살았는데,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와지라냐노는 팔레고아 대리구를 사원에서 기독교 설교를 하도록 초대했다.

와지라냐노는 팔레고아 대리구가 제시한 기독교 도덕과 업적에 감탄했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그는 나중에 왕으로서 그를 지칭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에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훌륭하지만, 믿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리석다.”

짜끄리 마하 프라삿 왕좌 홀, 그랜드 팰리스에 있는 몽꿋 왕의 초상화


몽꿋 왕은 후에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유명해졌지만, 그의 동생인 핑클라오 총독은 그보다 더 유창했다고 전해진다.

몽꿋 왕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쭐랄롱꼰은 1902년 종교 정치법을 통해 담마윳 종파를 왕실의 인가를 받았다.

담마윳 종파는 현대 태국의 양대 불교 종파 중 하나인 보수파가 되었다.

쭐랄롱콘은 또한 아버지의 47번째 아이인 와지라냐나를 설득하여 승단에 들어갔고, 그는 1910년부터 1921년까지 태국의 10대 상가라자(승왕)가 되었다.

글·사진 = 보검 스님 ㅣ 세계불교 네트워크 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