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에서 ‘동물들의 어머니’, ‘개의 어머니’라 불리는 공경희 님의 결혼 초 겪었던 고난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분이 어떻게 동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헌신적인 삶을 통해 수많은 유기동물의 버팀목이 되었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남편의 49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공경희 님은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허리 다친 말티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마치 허리를 다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영혼이 담긴 듯한 마음에, 그 개를 정성껏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은 인연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길 위의 유기견들이 더 이상 예사롭지 않게 보였고, 그녀는 버려진 개, 눈 먼 고양이, 피부병 걸린 개, 홍역 걸린 개, 심지어 개장수에게 팔려갈 위기에 처한 개들까지 하나둘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백 마리가 넘는 동물들과 함께하게 되면서 좁은 공간과 끊임없는 민원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결국 2,500만 원짜리 집을 마련해 포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두 아들은 성인이 되어 친정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하고, 그녀 홀로 동물들과 포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물들에 대한 측은지심은 깊어졌고, 유기견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늘어나는 민원에 그녀는 직접 민원 서류를 취합해 포천군청에 제출했고, 당시 이진오 군수는 그녀의 선행을 높이 평가하여 재정경제부 소속 국유지 수천 평을 대여 받아 견사를 짓고 홀로 유기동물 보호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녀는 동물구조단에 넘겨진 유기견들이 20일 후 안락사 당한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하며, 단 한 마리라도 더 받아들여 평생 편안히 살다 갈 수 있도록 보호소를 운영했습니다.
사설 동물보호소였기에 정부의 혜택은 전혀 없었지만, 점차 그녀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후원자와 봉사자들이 늘어났고, 국내에서 가장 큰 동물보호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수많은 유기동물을 수용하면서 사료 값 걱정, 병원비 걱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손이 부족해 직원을 늘려 운영했지만, 제때 월급을 주지 못해 둘째 아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겨울에는 보일러조차 없어 병든 개 30마리와 체온을 나누며 추위를 이겨냈고, 영하 8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 물이 얼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또한, 병든 개를 맡기고 가는 무책임한 사람들 때문에 떠맡아야 하는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방송을 통해 더욱 알려지면서 더 많은 개들이 들어왔고, 그에 따라 공간은 좁아지고 시설은 노후화되어 환경은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동물들의 생활 조건은 나빠지고 일손은 턱없이 부족하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아파도 자식 같은 동물들을 잠시라도 비울 수 없어 찾아뵙지 못하고 마음으로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런 힘든 굴레에 한탄도 해보지만, 어린 자식 같은 동물들을 보면 다시 힘을 내 똥을 치우고, 물과 음식을 주고, 싸움을 말리고, 병든 개들을 치료하고 병원에 데려가는 등 단 한순간도 쉴 틈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땅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 법적 소송에서 패소하여 보호소를 떠나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패소 후에도 새로운 장소를 구할 수 없었고, 이 많은 동물들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결국 강제 집행을 받을 때까지 10여 년을 법적 소송과 비난 속에서 버텨왔습니다.
이제는 연로하신 나이, 반평생을 정말 동물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쉴 때가 된 듯합니다.
지금은 자신의 뜻이 아닌 세상의 흐름에 밀려 물러나 아침이면 비둘기와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지팡이에 의지해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련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생명 사랑의 아름다운 풍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곡담 스님 ㅣ 서울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