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태어남(生),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변함없이 일어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같은 과정을 겪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모습은 전혀 달라집니다.
생로병사는 사람의 일생이라 할 수 있고 일생을 구분하면 즐거운 인생, 괴로운 인생, 참답게 살아야 하는 인생, 즐기며 살아야 하는 인생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생로병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인생을 제시할까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위험에 대한 공포심과 고통을 직·간접으로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는 실생활에서 무수히 목격됩니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가는 노인들, 큰 소리를 지르게 집안 도구들을 부수며 싸우는 이웃들,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어 죽은 사람들, 간암·폐암 등에 걸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등등.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문득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부처님 또한 이러한 생로병사의 고통을 깊이 관찰하시고(사문유관) 출가하여 수행에 정진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시어 생사에서 해탈하셨습니다.
누구나 늘고 병들고 죽기에 이것을 한번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면 “어떻게 해야 속 시원한 해답을 얻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태어난 존재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 원인을 밝히고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태어남이란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 들어가는 것이고, 고통의 시작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성장하면서 희노애락에 끌려가고, 노ㆍ병ㆍ사와 근심ㆍ걱정을 받는 인생을 예약한 것입니다.
늙음이란 태어난 후,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것이고, 젊음의 패기와 아름다움은 쇠약함과 추함으로 변해가는 것을 의미하며, 근심·걱정을 안겨준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노후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자칫 탐·진·치와 이기주의를 선택하여 고립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병듦은 우리에게 고통과 불편함을 줍니다. 음식을 잘못 먹어ㅗ 병이 들고, 많이 먹어도 병이 들며, 몸을 과하게 사용해도 아프고, 너무 게을러도 병이 찾아오니 근심 걱정 끊길 날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생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두렵고, 내생이 어떨 지에 대한 두려움도 크며, 실제 죽음의 고통도 큰 것입니다.
이러한 생로병사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이 우리 앞을 막고 있어 자유롭지 못하니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떻게 잘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생로병사에 대한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보고 여기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행의 입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열반입니다. 이러한 해탈을 얻기 위해 발심을 한 이들은 스님이 되거나 재가 수행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바치기도 합니다.
생사해탈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를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는 苦·集·滅·道로 모든 존재들이 받게 되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인 無明과 渴愛(집착과 탐욕), 고통의 멸함과 고통의 멸하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멸하는 길은 팔정도(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입니다. 또
사마타(집중) 수행과 위빠사나(통찰) 수행을 통해서도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에서는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 등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십이연기는 無明 → 行 → 識 → 名色 → 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생로병사라는 과정을 밟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에 대한 자신의 마음에 따라 가지각색의 인생이 펼쳐지니, 우리들은 때때로 자신에게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시작이 반이며, 지금이 가장 빠른 때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자는 두려움이 없으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