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WBM-TV 회장


회색빛 도시의 소음이 잦아들 즈음, 경기도 시흥 군자산(君子山) 자락에 깃든 ‘영각사(靈覺寺)’를 찾았다.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산사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결계(結界)를 넘어선 듯 세속의 풍경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삼면이 산으로 포근하게 감싸 안긴 형세는 어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했고, 도시가 지척임을 잊게 만드는 깊은 산속의 정취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영각사가 내게 건넨 첫 번째 위로였다.

가람의 배치는 정갈했다. 산의 중심축을 따라 묵직하게 자리 잡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요사채와 종무소, 공양간이 호위하듯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사찰과 다름없는 평온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영각사의 진면목에 온몸이 전율에 휩싸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무량수전 내부를 가득 채운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목조건축의 웅장함이었다. 단순히 규모가 큰 것이 아니었다. 나무의 결을 살려 정교하게 조각된 목조 탱화는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붓으로 그린 평면의 그림이 아닌, 나무를 깎아 입체적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해 낸 그 지극한 정성 앞에 절로 합장 배례가 올려졌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법당을 나와 마주한 ‘바라나시 희망정원’은 영각사가 품은 또 다른 비경(祕境)이었다.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의 이름을 딴 이곳은 지하에 조성된 약 2천여 평 규모의 거대한 성소(聖所)다.

수많은 선망 조상님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운 무덤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 다른 차원의 빛으로 향하는 듯했다.

‘희망정원’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죽은 자들만의 적막한 공간이 아니었다. 산 자가 찾아와 떠난 이의 넋을 기리고, 떠난 이는 산 자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야말로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소통의 장이었다.

현대인의 삶은 바쁘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나의 뿌리인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은 점차 형식적인 의례로 축소되곤 한다.

그러나 영각사의 이 거대한 지하 정원을 거닐며 나는 새로운 불교 장례 문화를 마주했다.

딱딱하고 무거운 추모가 아닌, 숲길을 산책하듯 편안하게 조상님과 대화할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보다 먼저 이 땅을 살다 가신 이들의 삶과 나의 남은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어느덧 산사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군자산 자락에 울려 퍼졌다.

“뎅- 뎅-”

묵직한 종소리는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고 마음속 번뇌를 잠재운다. 도심 속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나’를 되찾고, 조상님을 향한 그리움마저 따뜻하게 보듬어 안은 시간. 오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운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산문을 나서며 다시 도시의 불빛 속으로 향하지만,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쳐본다. “오늘 참 행복했다”라고.

이 울림이 내일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를 바라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